건축과 자연

예천 병암정(屛巖亭)

필그림2 2011. 8. 2. 00:03

예천 병암정(2011.7.29)

 

병암정은 예천 용문면 금당실마을 초입에 위치하여 대청마루에 서서  넓은 들녘과 마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소백산맥의 풍경이 일품이다.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정자가 위치한 병풍같은 바위와 아래에는 자연과 인공의 조경미가 뛰어난 연못이 멋스럽다.

조선 고종 광무2년(1898년) 법부대신 이유인(李裕寅)이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 등의 비결에 능한 조선 명조대 학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십승지지의 한 곳으로 비정한 금당실(金塘室)로 낙향하여 아흔아홉칸 저택과 함께 옥소정(玉蘇亭)이라는 이름으로 이 정자를 지었다.

옥소정을 1920년 예천권씨 문중에서 매입하여 이름을 병암정으로 고쳤다.

정면 5칸,측면 2칸의 마루와 온돌시설이 갖춰진 별장 건물이다. 정자 주변으로 담장이 쳐져있어 운치를 덜어뜨리는 흠이 있다.

병암정 뒤 야산 송림숲 백로들의 요란한 소리가 한여름 정취를  더 해준다.

 

 

이유인(1843-1907)이라는 인물은 김해출신 중인신분의 점술가로 추정되어지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업고 경상감사,한성판윤,법부대신 등의 요직을 맡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국호 "대한제국" 과 연호 "광무" 제정에 관여하기도 하고, 대법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재판소를 설립하는 등 업적도 남겼으며,1898년 명성왕후를 살해한 을미사변때 일본을 규탄하다가 한때 고금도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그후 경무사(警務使)가 되고 1904년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05년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으나 1907년 여름 귀양살이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자주 국권을 위해 일본과 맞선 항일운동가이기도 하였지만 입신출세 과정과 재산형성과정에 수많은 의혹과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힘없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시킴으로 많은 지탄을 받은 인물이다. <예천문학 박근노 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