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영남대로에 축성한 청도읍성(淸道邑城)(2015.01.17)

필그림2 2015. 1. 27. 17:44

영남대로에 축성한 청도읍성(淸道邑城)

 

 

 

청도읍성이 있는 화양읍 주변은 삼국시대에 변한 12국중 하나였던 이서국(伊西國)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서국은 신라 유리왕 14년(37)에 신라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기도 했고, 유리왕 19년(42)에 견성의 싸음을 최후로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유리왕 20년(43)에는 이서군(伊西郡)이 되었다. 내해왕 12년(207)에는 오산현(鰲山縣), 경덕왕 16년(757)에는 소산현(蘇山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역시 밀양군(密陽郡)에 속해 청도현(淸道縣)이 되었으며, 조선 숙종 46년(1720)에 상읍내면(上邑內面)(13개리)과 차읍내면(次邑內面)(12개리)으로 나뉘었고, 1914년 상읍내면과 차읍내면이 합해져 화양면(華陽面)이 되었다. 1979년 5월에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청을 범곡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읍성은 행정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교육,제사기능이 복합된 성격의 성곽이다. 유사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임과 동시에 지방도시의 유지 및 행정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읍성은 산성과 달리 성 안팎으로 지방행정과 관련된 시설과 주거공간, 생활공간이 체계적으로 조성되었다. 청도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화양읍의 남고북저, 동고서저한 선상지에 축성한 석축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이다. 읍성의 형태는 향교가 위치한 동남쪽 모서리를 제외한 거의 방형에 가깝고, 남쪽의 남산을 진산(鎭山)으로 정해 북쪽을 향한 읍성의 입지와 배치구성은 우리나라 읍성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청도읍성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부터 경주와 인접해 있어 가야정벌의 통로가 되기도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개성-충주-청도-동래로 이어진 간선도로는 대구-팔조령-청도-밀양으로 이어졌고, 청도-창녕간, 청도-현풍간, 청도-경주간 사통으로 발달된 교통,군사상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청도읍성(淸道邑城)에 대한 기록은 단종 2년(1454)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청도군」편에 "읍 석성은 군 동쪽 7리에 석성이 있으며, 주변 둘레가 190步이고 성내에는 물이 없다"라고 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이 간행한 『오산지(鰲山志)』에는 "석성은 둘레가 1,403尺 이고, 동서북에 3문이 있다. 서문루(西門樓)는 기유(己酉) 년간에 군수 유비(兪秘)가 건립하고 무회(撫懷)라 하였다. 동북 2문 역시 함께 건립하였다. 선조 22년(1589)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와서 일본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보고하자 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직선로에 접한 곳은 모두 진을 치고 성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이 명에 의하여 당시 군수 김은휘(金殷輝)가 경인(庚寅) 년간(선조 23년,1590)에 시작하여 2년 후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성내 공사의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으며, 동문루(東門樓)도 병화로 없어졌다"라고 했다. 이 기록에서 학봉 김성일이 일본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보고하였다고 하는데 국조보감(國鑑)에는 통신사로 돌아온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부사인 김성일이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한 것으로 볼 떄 오산지의 김성일 보고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조 36년(1760)에 완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석축으로 둘레가 1,570步이고, 높이는 5尺 5寸, 如堞이 600첩에 동,서,북문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2005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한 『청도읍성정밀지표조사보고서』에 읍성의 둘레는 동쪽 성벽 구간이 530m, 북쪽 성벽 구간이 470m, 서쪽 성벽 구간이 380m, 남쪽 성벽 구간이 380m 로 약 1.8km라고 하였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청도군읍지(淸道郡邑誌)』의 1,570步 기록은 『경국대전(經典)』의 척도로 환산하면 1570步×5尺×20.83cm = 163,515cm(약 1,635km)로서 지표조사실측거리와 거의 유사함을 보였다. 임진왜란 당시 읍성을 점령한 왜적이 내성을 소규모로 축성하기도 했다.

 

성문은 조선 초에 동,서,븍 3문이 건립되어 존속해 오다가 임진왜란때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서문인 무회루가 헌종 10년(1669)에 처음 건립되었고, 동문인 봉일루가 숙종 34년(1708)에 다시 건립되었으나 또 없어진 뒤 정조 22년(1798)에 새로이 중건되었다. 1870년에 남문이 진남루가 처음 건립되면서 동,서,남,북 4문을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강점기 때 성내 동서로 확장을 핑계로 4문과 성벽이 부분적으로 철거되면서 읍성의 모습도 점차 훼손되기 시작했다.

 

객사(客舍)인 도주관(道州館)은 고려시대 청도군의 별칭에서 따왔으며, 1543년에 중창했다. 정당(政堂)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의 익공양식인데 지붕을 따로 높게 올리고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해 높게 만들었다. 양쪽에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좌우익실이 있다. 철거됐던 좌익실은 2005년에 복원돼 도주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도주관 입구에는 1871년 흥성대원군이 전국의 주요 교통로에 세운 척화비(斥和碑)가 옮겨져 있다.

동헌(東軒)은 1917년 군청사가 청도읍 고수리로 이전해감에 따라 다른 관아 건물은 용도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살아남았다. 학교 운동장 부지를 만들면서 내아(內衙)가 있던 현재 자리로 밀려났지만 동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동쪽 성벽 밖에는 길이 14.75m, 폭 5m, 높이 4.4m의 석빙고(石庫)가 있다. 지붕은 화강암을 이용한 네개의 홍예와 장대석 1개만 남아 뼈대만 남았지만 내부 빙실은 지하 구조로 잘 남아있다.『오산지(鰲山志)』에 따르면 당초 청도읍성 북문 밖에 토굴로 만든 것이 협소하고 허물어지자 조선 숙종 39년(1713) 2월 11일에 현 위치로 옮겨 착공하여 같은 해 5월 5일에 준공하였다. 석빙고 앞 석비(石碑)에는 석빙고 건축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으며,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는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크다.

 

청도읍성은 2005년 부터 역사적 고증과 발굴을 통하여 동문지에서 북문지까지 244m 구간과 동문지에서 향교 구간에 대한 복원을 마쳤다. 현재 서문지 주변으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며, 청도군은 2019년 까지 읍성 복원을 모두 마무리한다는 계획에 있다.

 

 

 

유적명 : 청도읍성(淸道邑城)

소재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동상리,서상리, 동천리

문화재 지정 :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 (1995. 01. 14 지정)

기타 주변 유적 : 도주관(道州館)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청도 동헌(淸道 東軒)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3호, 청도 향교(淸道 鄕校)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청도 척화비(淸道 斥和碑)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 보물 제323호, 선정비군

 

 

<참고자료>

 

『청도읍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청도군,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청도읍성 보수(복원) 기본 계획』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청도읍성 동,북문루 구역 외 유적』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9

[경북의 재발견.13]청도의 '역사자원' 읍성과 석빙고     <영남일보> 2012. 03. 30日字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