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찾아서

통일신라시대 서해안과 한강유역, 안양천 일대를 관방한 요새, 호암산성(虎巖山城)(2013.04.11)

필그림2 2013. 4. 15. 22:54

통일신라시대 서해안과 한강유역, 안양천 일대를 관방한 요새, 호암산성(虎巖山城)

- 호암산성의 초축세력은 백제인가,고구려인가,신라인가? -

 

 

 

4월도 중순으로 접어가고 있지만 꽃샘추위가 예년에 비해 꽤나 심술궂고 길다. 따뜻한 날씨가 많던 지난 3월 하순에는 일찍 개화가 시작할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는 이곳 중부지방에서 만큼은 빗나간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땅의 기운 만큼은 만연한 봄이 왔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겨우내 메마르고 거칠었던 맨땅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는 못하지만 이름모를 연초록빛 들풀들과 함께 하이얀 꽃다지, 진보라색 제비꽃 등 이땅의 소중하고 당당한 봄꽃들이 어울려 피고, 땅위에선 목련,개나리,살구,매화가 한창이고, 하나 둘 벚꽃이 꽃망을 터트리고 있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산에는 이미 진달래가 다소곳이 엷은 분홍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어 밋밋한 이른 봄산의 풍경을 은은하고 엷게 채색하고 있다. 자연의 새생명이 움트는 요즈음이 산을 오르는 길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하루 어느 때에라도 산성답사에 있어서 최적의 쾌적함과 즐거움을 준다.

 

<장방형의 잘 다듬어진 성돌을 이용한 호암산성 남쪽 성벽>

 

<호암산성 남쪽 성벽 - 방형 및 장방형 면석을 둥그스름하게 깍아 정연하게 축성하였다 ⓒ 2008.12>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걸쳐있는 관악산의 서쪽 줄기인 호암산(虎巖山,347m) 정상 능선을 따라 북동과 남서로 길게 축조한 테뫼식 산성인 호암산성(虎巖山城)을 1998년에 이어 5년만에 다시 찾았다.

수도권 전철 1호선 석수역에서 "서울둘레길 관악산구간"이라고 명명된 길을 따라 산아래에서 부터 10여분 꽤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비교적 완만한 능선 길이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호암산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석수역에서 호암산성이 있는 정상까지는 약 4km이다.

호암산 정상은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고, 호암산성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관악산 정상(冠岳山,632m)인 연주대(戀主臺) 불꽃바위가 위치하고, 동남쪽 1km 지점인 삼성산(三聖山,481m) 정상에는 고려중,후기에 피난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는 영랑산성(永郞山城)이 바라보인다. 또한 북쪽의 한강하류와 안양천 일대 평야지대와 서쪽으로는 멀리 서해안의 해안선이 잘 조망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유적인 광명 도덕산보루(道德山堡壘)와 인천 문학산성(文鶴山城)이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져있다.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는 호암산성 서쪽 성벽(내측)>

 

 『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도 금천현 고적조에는 <虎巖山古城>이라 하여 "석축이며, 둘레가 1천 6백 81척이고, 성안에는 큰 못이 있는데, 날씨가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라고 하였다.

호암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서울 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시 일대는 삼국시대에 먼저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이 한창이던 4세기말에서 5세기중엽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백제의 영역이었을 때에는 이곳이 어떤 지명이였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에 편입된 이후에는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불리어졌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에는 곡양현(穀壤縣)으로 바뀌었음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병마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행주산성의 권율장군과 협공으로 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다.

 

호암산성과 한우물이라고 하는 우물지(蓮池)에 대하여 1989년 10월과 1990년 3월 두 차례의 발굴조사가 서울대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호암산성은  해발 325m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으로 석축을 한 테뫼식 산성으로 총 둘레는 약 1,250m 이고, 동북쪽으로 약 300m 구간이 석축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산성 내부시설로는 우물지(蓮池) 2개소, 건물지 4개소, 추정 문지 1개소와 조선시대 우물지(蓮池) 1개소와 석구상(石狗像) 1기가 확인되었다. 건물지에서는 무문(無文),선조문(線條文),어골문(魚骨文),격자문(格子文),릉형집선문(菱形集線文),승문(繩文) 등 다양한 기와류가 출토되었으며, 그중에서 <仍大內>명을 비롯한 文字瓦가 다량 확인되었다.

제1우물지(한우물)는 방형으로 조선시대에 쌓은 석축이 남아있었는데 그 아래 경주 안압지와 구조가 유사한 통일신라시대 석축지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13단으로 정교하게 석축되었고, 윗단으로 갈수록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제2우물지도 대체로 제1우물지와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으며, 특히 "잉벌내력지애미(仍伐內力只乃末)"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출토되어 <삼국사기>의 이곳 지명 기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호암산성 내 복원된 우물지1(한우물) ⓒ 2008.12 >

<호암산성 내 우물지2>

 

이번 호암산성 조사에서는 축성방법에 있어서 예리하게 자른 장방형의 면석을 이용한 석축과 방형의 석축 모서리면을 둥그스름하게 가공한 석축, 그리고 성돌의 가공을 비교적 대충한 석축 구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축성 시기를 달리하는 흔적도 확인할 수 있어서 호암산성이 부분적으로 최소한 2차례에 걸친 증,개축 시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은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구간과 자연암반위에 축성한 구간, 내탁의 석축을 한 구간, 토석혼축 또는 토축 구간 등 지형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의 축성방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밖에도 추정 성문지 3개소 망대지 4개소와 추정 배수구 1개소도 확인 할 수 있었다.

 

 <호암산성 동문지>

 

<호암산성 내 출토 기와편 ⓒ 2008.12>

 

호암산성의 축성시기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는 없지만 현재까지 실시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과 산성이 위치한 지형과 입지조건 등을 검토해보면 신라 통일기에 한강하류에서 안양천을 따라 연결되는 육로와 서해안 일대를 효과적으로 관방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발굴조사 과정의 출토유물이 7~8세기 경을 중심연대로 하고 있어 신라 문무왕 때 나당전쟁(670~677) 과정에서 이 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호암산성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성이 위치한 역사지리적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호암산성의 초축 상한 연대와 경영 및 활용에 있어서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적이 훼손되기 전 서둘러 호암산성에 대한 쳬계적이고 전체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현재 호암산성은 주변 우물지와 함께 <한우물과 주변산성지>라는 조금 애매모호한 유적 명칭으로 사적 제3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참고자료>

 

『한우물-虎岩山城 및 蓮池發堀調査報告書』「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한국고고학전문사전 -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한강의 어제와 오늘』「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