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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식토기, 낙랑군 설치 이전 등장"(연합뉴스 2010.10.13)

필그림2 2010. 10. 13. 22:12

"중도식토기, 낙랑군 설치 이전 등장"


凸자형 주거기 무더기 발굴 (서울=연합뉴스) 대한주택공사 서울지역본부가 시행하는 남양주 장현지구 주택건설사업 부지에서 모두 85기가 군집을 이룬 채 발견된 기원전후 무렵 평면 凸자형 주거지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 풍납동식무문토기, 중도식무문토기. 혹은 경질무문토기라고도 한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매산기념강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고고학계에는 토기에 대한 논문이 많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도 고고학계가 그간 쏟아낸 논문 중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토기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 많은 토기 논문 중 정작 그들 토기를 각각 당시 사람들이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천착한 글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이 14일 오후 2시 이 대학 한경직기념관에서 여는 제7회 '매산기념강좌'는 토기에만 국한할 때 늦어도 기원전후 무렵에는 한반도 중남부를 '통일'하는 이른바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분야 연구자 4명이 각각의 연구성과를 내놓는 이 자리 또한 여전히 주된 관심은 종래 한국고고학계가 주력한 대목들, 다시 말해 중도식토기가 등장한 시점과 그 기원, 그것의 시대별ㆍ지역별 변천 모습을 규명하는 데 주력한다.
그런 점에서 한지선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중도식 경질무문토기의 기능과 사용법'에 대한 연구 결과만큼은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중도식토기가 과연 실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생각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 연구사는 13일 미리 배포된 발표문에서 중도식토기의 기종과 용량을 구분하고, 사용한 흔적을 분석해 용량별 용도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경질무문토기개성공단 예정지에 대한 2004년 4월20일-7월31일 남북공동학술조사 결과 기원전후 무렵 삼국시대 전기 주거지에서 출토된 . 이런 공동조사 성과를 정리한 '개성공업지구 1단계 문화유적 남.북 공동조사 보고서'가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나왔다./토지박물관 제공/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6.1.15 (서울=연합뉴스) <

그 결과 소형은 직접 음식물을 조리하는 데 사용했으며 중대형은 시루와 결합해 음식물을 조리하는 데 썼고 대형은 곡물이나 식재료 저장용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발표자 중 정인성 영남대 교수와 유은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중도식토기의 등장 시점과 관련, 기원전 108년 낙랑군 설치 이전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 뿌리가 되는 전통에 대해서는 정 교수가 위만조선시대에 중국 전국시대 계통의 회도(灰陶)와 화분형 토기가 등장한 데서 구한 데 비해, 유 연구관은 연해주와 두만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 계통의 '단결-크로우노브카' 토기를 지목했다.
이에 더해 이성주 강릉원주대 교수는 청동기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지속한 무문토기 전통이 중도식토기의 등장으로 나타났으며 제작 기법으로 볼 때 이 토기는 중부지역권과 호남지역권, 그리고 영남지역권의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도식토기는 국립박물관에 의한 춘천 중도 유적 발굴에서 제대로 확인된 무늬 없는 토기라 해서 '중도식 무문토기'라고도 하며, 서울 풍납토성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해서 '풍납동식무문토기'라고도 한다.
또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문토기에 비해 굽는 온도가 높고 단단하다 해서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도 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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